2009년 8월 13일 목요일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서울노회 목사 임직 예배

1999년 5월 25일(화)오후2시 목사 임직 설교문

고린도전서 15:9~11

서울교회(www.seoulch.or.kr) 배성산 목사

목사임직자 : 이성원(공덕) 김광호(서문밖) 조성철(경서) 정경표(보광동)

오세봉(경복) 이정희(수도) 정미현(평광)

준목인허자 : 문은성(동원) 변영규(신흥)

목사후보생공인자 : 윤성진(향린) 최성실(서울제일) 예선영(공덕)

손은실(용산제일) 박현미(방주) 문지정(초원) 김현철(용산제일)

목사가 된다고 했을 때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소명감이다. 우리가 목사라는 성직을 하나의 직업으로 택하기 전에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어 이 일을 맡기셨다는 확실한 신념이 있어야 하는 일이다. 성직이란 우리의 선택에 의하여 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선택여부가 없기 때문이다. 조건이나 가능성이나 회피나 그런 것이 있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무상 명령적인 강요가 나를 결박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란 엄격히 따져 말하자면 목회자 자신의 일이 아니오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목사들은 자신을 "복음의 사신"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일꾼"이라 자처하여 충성과 복종만을 그 생명으로 삼았다. 이처럼 소명감을 안고 목회 전선에 나선 자는 언제나 두 개의 자의식(自意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는 책임감이요, 하나는 사명에서 오는 영광의식이다. 책임감은 그로 하여금 침착, 신중, 겸비, 조심, 근면, 경건, 순결, 청렴, 복종을 가지도록 할 것이오, 영광의식은 그로 하여금 대담, 고결, 염치, 용감, 고매하게 해 줄 것이다. 목사의 외침은 평범하거나 무기력하거나 흐릿할 수 없다. 그의 걸음은 주저나 방황이나 억지로 꾸미는 걸음일 수 없다. 숨쉴 때마다 사명감에 불탈 것이오, 잠을 깨면 소명의식에 옷깃을 바로잡게 되어야 한다. 목사의 삶은 끊임없는 하늘 영광의 연속이요, 피곤을 모르는 승리의 행진일 뿐이다.

신비하고 영광스러운 이 성직을 어떻게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복음의 사신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성직의 제1선에서 활약하였으나 언제나 자기 앞에 보이는 위험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주의와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고 반성과 자책을 깊이하며 겸손히 자기를 쳐 복종케 하기를 쉬지 않았다.

목사가 되고 목회를 해 가는 일에 몇 가지 주의해야 할 일이 있다.

목회자들의 경륜 어린 경험에서 얻는 교훈이 있다. 첫째는 목사는 너무 쉽게 교회생활에 젖는다. 너무 경솔히 하나님의 보좌 앞에까지 드나든다는 습성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자주 버릇없이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다룬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불손(不遜), 거룩함에 대한 불경(不敬), 장엄함에 대한 경솔(輕率)이 있다. 우리가 목회에 나서면 오래지 않아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거룩한 사실, 거룩한 곳에 대하여 분방하다는 핑계로 주님께 실망케 하는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적인 행사에 매우 바쁘면서도 우리 자신은 교회적이지 못할 경우가 너무 많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서서 옳은 길을 가리키는 사람일 뿐 그 옳은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을 가르치는 교사는 될지언정 진리를 찾는 순례자는 아닌 경우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서재는 하나님을 은밀히 찾는 다락방인 대신의 하나의 일터가 되고 만다. 우리는 너무 말을 많이 하다보니 말씀을 받아먹는 일을 곧잘 잊어버리고 만다. 감격과 경외의 심정 없이는 생각할 수 없고 거룩한 사실 위대한 진리를 이제는 아무 감각 없이 다루고 지껄이는 것이다. 신앙이 형식화되고 교회가 이론화되고 있는 현상이다. 거기에는 해골만 남아 있고 생명의 숨결이 없다. 불타고 남은 재만 있고 뜨거운 불은 꺼진 상태이다. 이러한 목사는 설교할 능력을 잃고 만다. 그러니까 자연히 딴 놀음이라도 해야 한다. 영적 경험이 고갈하였으니 저절로 무슨 꿍꿍이를 꾸며야 하게 된다. 이는 무서운 타락이요, 경보주의이다. 이것은 신학적이고 이론적인 논쟁에는 큰 관심과 흥미를 가지나 경건한 삶의 능은 잃은 것이다. 세력을 얻고 기반을 튼튼히 하려는 정치적 분란이나 그룹운동에는 앞장설 것이지만 자신이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경우에는 꽁무니를 빼고 만다. 그는 소명의식에서 성직생활을 시작하였다 하더라도 얼마 되지 않아서 모르는 사이에 쉽고 값싼, 성공했다는 목사 흉내만을 내는 것이다. 이는 정말로 주의해야 할 일임을 명심해야 한다.

둘째로 주의하여야 할 일은 일상적인 평범한 일 작은 일에 소홀하다. 성직자의 사명이란 영원과 시간, 하늘과 땅, 진리와 실생활, 복음과 행위, 하나님과 인간, 이 양자의 중간에 서서 이 둘을 화해시키는 역할이고 지상의 것을 하늘로 끌어 올려야 하며 복음의 진리를 실제 생활로 끌어내려 거기에 적응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그러치 않고 이 둘에 막힌 담의 벽이 생길 때 둘 다 무의미하게 되고 만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과 사람을 만나게 하는 역할을 하는 자라는 표현이 매우 타당하다. 성직은 삶을 하나님의 무릎 앞으로 안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의 현실 속에 소개하는 일이다. 목사가 거룩함을 잃고 평범을 모르거나 영원을 이해하되 시간을 무시하거나 하나님을 알되 사람을 등한히 한다면 그것은 어느 한쪽도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성직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목사의 입에서는 흔히 큰 술어들이 튀어나온다 더구나 젊은 목회자들의 입에서는 매우 굵고 큰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용어들이 마구 쏟아진다. 그러나 그런 말들이 다만 우리의 사소하고 평범한 생활 경험 속에까지 스며들게 될 때라야 의미가 있고 효과가 있다. 목사는 끊임없이 신도들의 일상생활을 살필 수 있어야 한다. 복음진리의 물줄기가 저들의 사소한 일상생활에까지 젖어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저들의 현실적인 삶의 고민과 문제와 요구를 찾아봄이 없이 큰소리만 친다면 이는 상아탑 속의 신앙은 될 수 있지만 사람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문제의 고민을 해결해 주는 복음일 수는 없다.

세 번째로 주의해야 할 사항은 성직자가 자신의 감정과 의지 곧 인격을 조화 있고 품위 있게 조율하는 일이다. 성직자들은 어느 정도 날카로운 정서의 비정상적인 감정상태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신령한 목사님이 되기 위하여 이상스런 모양을 하고 일종의 병적이고 신경 쇠약한 자 같은 풍모를 가지고 그 감정이 정상적이 아닌 방향으로 움직이는 이들을 본다. 교인의 감정을 쉽게 잡아 흔드는 설교는 마치 바다의 광풍과 같아서 신경에 카다란 강요작용을 일으키며 때로는 크게 격양시키기도 한다. 그것을 성령의 역사인 것으로 밀어붙이지만 실은 성령의 작용이기보다는 스스로 자기 도취에 빠져 자칫하면 마음의 문 밖에 쭈그리고 않아 때를 기다리던 악마가 틈을 보아 유혹하기 쉬운 기회로 제공되기도 한다. 유행처럼 번지는 불건전한 흥분 집회가 가끔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본다. 결코 부흥회의 효과를 무시하거나 배격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남의 흉내로 어리석은 추종을 일삼다가 유사목사 또는 모방목사(흉내목사)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주의해야 할 것은 세속적인 허영에 빠져들기 쉽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목회 생활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인기, 영광, 지위, 교권 등에 강한 열망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직자를 유혹하는 함정은 세상에 어디든지 있다. 이런 세속적인 경향가운데 가장 심각한 한 가지는 타협주의라고 생각한다. 일명 편법주의, 회색주의 혹은 기회주의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때로는 권모와 술수도 사양하지 않으며 기회를 따라 형편을 따라 농간을 부리는 타협주의 말이다. 아첨을 겸손으로 가장하고 계략을 능력이라 하며, 권모술수를 슬기로 가장하고 비굴을 양보라 하는 사고방식이다. 그러므로 타협주의는 결국 그 자신의 도덕적 이상을 저급한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일이요, 자기의 고상한 신념을 닫고 불의에 영합시키는 놀음에 놀아난다. 타협주의는 흑과 백의 중간노선을 걷기 좋아하기 때문에 흑도 아니오 백도 아닌 회색주의에 빠진다. 밤중도 아니고 대낮도 아닌 어스름한 인생이요 새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박쥐의 놀음일 뿐이다. 이런 사람들이 마침내 예배자의 처소를 강도의 굴혈로 만든다. 하늘의 복과 인간의 박수를 한꺼번에 얻으려 하고 회장이나 거리어구에 주민 기도처를 만들어 내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는 나팔을 불고 제 보따리 펼치는 위선자가 생겨난다. 그러나 그들의 소행은 마치 모래 위를 흐르는 시냇물 같아서 얼마 안 가서 다 지하로 스며들고 마는 생명 없는 모래밭 성직일 뿐이다.

세속주의와의 경합 속에서 또 하나 문제를 든다면 성공을 조급하게 서두르는 초조한 인위적 노력을 삼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서 빨리 일류 목사가 되고 싶고 유명해 지고 싶어 조급해 하는 마음, 인기 끄는 목회, 이것은 목사 앞에 놓인 함정이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 주님이 광야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당하신 유혹은 자기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끈질기게 주님을 괴롭혔다. "네가 내게 꿇어 절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영광을 네게 주리라" 그것은 역시 우리에게로 오는 유혹이기도 하다. 우리가 목사가 되는 첫날부터 이 마귀의 꼬임은 평생을 따를 것이다. 이상의 종합적인 경륜의 경험에서 얻은 지적 몇 가지를 소개하면서 성직인 목사직은 어렵다. 다른 직업은 어떤 기술을 습득하면 되겠지만 성직은 반드시 소명감에서 출발해야하고 그러면서도 길옆으로 조금만 한눈을 팔면 바로 굴러 떨어지고 마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항상 기도해야 한다. 오직 십자가의 주님만을 위해 충성된 종으로 겸손히 빛도 이름도 없이 섬기는 하나님의 종임을 자각해야 한다.

목사 안수를 받는 여러분은 이제 목사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름 부은 종이 됩니다. 하나님의 종은 어떤 사람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종은 자기 선전을 하지 않는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일도 없고 대우가 나쁘다고 투덜대는 일도 모른다. 그는 과연 털 깎는 자 앞에 끌려가는 양의 모습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온순한 인격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설치고 싸우고 자랑한다.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서 이익, 출세, 영광만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 주의 종,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일꾼은 조용하다. 입을 다물고 묵묵하다. 사랑과 충성과 봉사만이 있을 뿐이다. 또한 하나님의 종은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고 인격의 가치를 소중히 여김으로 인간을 사랑한다. 겉모양으로 판단한다함은 그 사람이 가진 돈이나 지식이나 세상 권력 따위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을 상품화한다. 거래의 수단으로 삼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모든 인간의 영혼을 사랑할 따름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종은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이다. 왠지 모르지만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이들은 흔히 가난과 고독과 고난을 맛본다. 그것이 이른바 십자가의 길이다. 그러나 그 길만이 참된 인생의 승리의 길이요 인류의 희망이 된다. 부름 받아 나선 이는 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사람이 사람다움으로 제 모습 찾기에 노력해야 한다. 제자리, 제 모습을 잃고 설쳐대며 자꾸만 경박해 간다. 전문적 지식, 자격취득, 배금주의 등등의 자격을 갖춘다면 "무엇이 되기"는 쉽다. 그러나 그 목적을 이루어 '답다'라는 인정을 받는 과정은 그 사람 참 모습에(인품) 관한 문제이다. 회장이 되고 총회장이 되고 총장이 되고, 정치가, 교육자, 변호사, 의사, 장관, 대통령이 되기는 쉽지만 정말 "답다"라는 평을 받는 것을 무엇일까? "답게" 사는 삶의 자세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목사답게 살자!

21세기를 여는 대망의 미래 기약에 하나님의 종으로 탄생한 것을 축복하면서 이 분들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의 참신한 '부름 받아 나선 이'가 되기를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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