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12일 수요일

먼저 구하는 것

먼저 구하는 것

이사야 40:1~5

마태복음 6:19~34

배성산 목사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난의 근원을 찾아가 보면 그 밑바탕에는 국민들의 생활이 개선되어야 함을 볼 수 있다. 경제는 성장하는데 국민 생활은 개선되지 않고 오히려 삶의 질이 뒷걸음질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나와 사회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시야에서 볼 때 한국인의 가치관은 아직도 서구인들의 보편적 개인주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폐쇄적 집단이기주의에 지배 되고 있다. 보편적 개인주의는 전체사회의 이익과 자기 개인의 이익을 직결시켜 이를 동시에 추구 해야 하는 가치관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폐쇄적 집단이기주의는 전체 사회속에 존재하는 내 가족, 대학 동문, 같은 고향, 같은 성씨와 같은 소집단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것으로서 이들 소집단에 소속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불가피하게 배타성을 지니게 된다. 서구의 보편적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적인 부정이나 불의를 용납하지 않고 고발하는 정신이 강하다. 사회 질서를 지키고 사회 시설을 아끼는 마음은 사회전체 이익의 틀 안에서만 개개인의 이익이 극대화 될 수 있고 개개인의 이익을 존중하는 틀 안에서만 사회 전체의 이익이 극대화 될 수 있다는 이른바 보편적 개인주의를 생각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오늘과 같은 우리 사회에 자리잡고 있는 가치관에서는 합리주의와 효율이 생성될 수 없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6장을 통하여 예수의 3가지 소유에 대한 원리를 배워야 한다. 첫째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물질을 다루기도 하려니와 만들지는 못한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사람이 '내 것이다'할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탁하신 것이다. 둘째는 사람은 물건보다 중하다. 사람을 물건으로 다루며 재물을 모으면 그것도 불의한 재물이 된다. 셋째로 재물은 종속적 선이요 최상의 선이 될 수 없다. 돈은 자기의 사욕을 위해 쓸 때 나쁜 것이요 남을 위해 쓰면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재물을 가진 자는 책임이 크다. 자기 뜻 때로 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쓸 것이다. 사람이 먼저 소유하고자 하는 것은 생활 속에서 피부로 느껴지는 것, 즉 의식주의 해결을 생각하지만 자칫 물질지상주의로 빠지게 된다. 그러나 성서는 '먼저'라는 순차적인 언어를 써서 선후로 나누어 말씀하신다. 먼저는 '그의 나라와 의'를 우선으로 강조한 것이다.

한해를 보내고 한 해를 맞으며 송구영신의 인사를 나눌 때 사람들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인사한다. 흔히 '복'이라고 전제된 인사말 속에는 물질의 풍요를 담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의사에게 새해 인사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했을 때 실제로 그 의사에게 비는 물질의 복이라는 의미는 금년에 치유 될 수 없는 병이 만연하여 병원이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리라는 소망을 담게 된다. 또한 우리가 변호사에게 새해 인사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하고 인사했을 때, 우리는 금년에 무질서와 폭력이 만연하여 변호사가 할 일이 많게 해달라는 소망이 돼버리고 만다. 더구나 장의사에게 비는 복은 금년에 사망하는 사람이 많아서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는 소망인데, 만약 우리 사회가 전쟁이나 전염병의 유행, 삼풍백화점과 같은 붕괴사고로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상황이 생긴다면 우리는 장의사에게 내리는 축복으로 봐야 할까?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두 '먼저' 자기 앞의 이익만을 놓고 복을 빈다면 이것이야말로 폐쇄적 집단 이기주의의 현실이라 말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이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은 당연하다. 그런 삶에의 의지와 정열은 인간 역사와 문명을 가능케 하는 파토스로 작용한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 행복한가 무엇이 생명에의 참여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그런 조건들만을 소유하려든다는데에 있다. 특히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양식은 바벨탑을 쌓아가던 창세기의 고대인들처럼 경쟁적으로 자신의 소유물을 쌓아가는 것으로 삶을 확인하려고 한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무엇인가를 소유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최대의 목적으로 할 때 인생살이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함께 풍성하게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을 오리겐(Origen)에 의하면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되 더 큰 것을 구하라 그리하면 작은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늘의 것을 구하라 그리하면 땅의 것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응용풀이 하였다.

정권교체가 이루어져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제2건국의 틀'을 짜자고 소리를 높이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의 구조 변화와 개혁을 부르짖고 있는 이 때에 우리의 삶 속에 생활의 의식 구조를 다시한번 점검하지 않을 수 없다. 해외여행을 해 보면 좋은 환경과 자연 경관이 보전되고 시냇물, 강, 바다 속에 노니는 고기들, 맑은 공기, 주차질서, 교통질서 등 질서 정연한 모습과 마을마다 도서관이나 양로시설, 정년퇴임자를 위한 시설, 의료보험 서비스 등 질서가 있고 걱정이 없을 것 같은 복지사회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선진국 보다 더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 선진국의 서민들이 거의 월세로 사는데 비해 우리는 전세나 자기집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미국이나 독일에서 5억 이상의 재산을 소유한 사람은 흔치 않다. 이들이 소득이나 월급이 적어서가 아니다. 국민이 내는 세금의 차이가 크게 다르다. 이들은 개개인은 가난하지만 사회는 부유하다. 반면 우리나라는 개개인은 부자이지만 사회는 가난하다. 우리는 먼저 사회재산이라 할 수 있는 공기, 물, 도로, 학교, 철도, 산, 나무 등 사회 공공재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회저축에는 4가지 가 있다. 첫째는 세금이다. 둘째는 연금, 의료보험, 생명보험, 출연금 등이다. 셋째는 유산의 사회 환원(상속관념의 극복)이다. 넷째는 자원봉사이다. 부유한 나라 선진국은 자기 재산보다 사회재산에 관심을 갖고 공동체의 삶을 지향하며 순응하려 한다. 폐쇄적 집단이기 속에 갇혀 있는 우리를 일깨우는 일면이라 할 수 있다.

거품을 빼는 오늘의 현실 하에 개혁해야 할 문화적 한 실례를 들면, 혼례문화를 들 수 있다. 서구에서는 양가 가족과 주례와 함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저녁에는 양가 친척을 초대 하여 저녁식사를 함께 나눈다. 신랑신부는 집마련도 필요없고 생활에 직접 필요한 것만 간단히 장만한다. 우리나라는 청첩장, 방명록, 약혼식, 예단, 함, 폐백, 결혼식장마련, 식사대금 등이 소요된다. 1년에 40만쌍이 결혼한다는데(80만명이 결혼하는 셈) 그 결혼 비용은 평균 3,500만원이라 한다. 이것을 종합하면 1년에 우리나라에서 30조억원이 낭비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 30조억은 현재 실업자 200만명에게 매달 150만원씩 1년동안 지급할 수 있는 돈이다. 이렇게 되면 혼례문화 간소화를 위해 개혁해야 할 당위에 놓이게 된다. 귀금속 수입 순위를 보면, 미국, 일본 다음 세 번째가 한국인데 귀금속 수입비용이 10조억원이나 든다고 한다. 이것만 가지고도 실업자 200만명에게 매달 50만원씩 1년간 지급할 수 있는 돈이다.

기독교는 물질을 부정하다거나 경시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과 물질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세우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 물질을 올바르게 다룰 수 있는 근본적인 태도를 기독교는 가르쳐 줄려고 한다. 신약에서 물질의 소유와 사용 그리고 그 분배를 '청지기의 직분'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지적할 수 있는 두 가지 기독교 경제윤리는 첫째 청지기 의식이요 둘째는 소명의식이다. 인간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청지기 의식은 오늘 우리 상황에서 절실히 요청된다. 청지기는 주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기심을 극복해야 한다. 생명과 재산의 궁극적 주인은 하나님이요 청지기는 관리자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충성과 헌신이 요청된다. 한편 소명의식은 우리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직업의식이다. 한 사회의 안전도는 그 사회내의 직업 만족도와 정비례한다. 그렇다면 직업 만족의 근원은 무엇일까? 임금이라 할 수 있겠으나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직업을 가치와 보람의 원천으로 믿는 마음의 자세이다. 이러한 마음의 자세는 직업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여길 때 가능하다. 고도의 물질문명이 가져다주는 폐쇄적 이기주의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심각한 괴리와 소외현상 등은 엄청난 가치혼돈을 몰고 왔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최우선적 추구대상으로 삼을 때에만 모든 염려에서 놓여나 항상 자족할 수 있으리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국 경제를 개혁하고 틀을 짜기 위해서, 경제활력을 회복하기 위해 생산비는 낮고 생산성은 높게 해야하고 경제 정의와 도덕성을 확고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먼저 구하는 것'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우리 삶의 현실로 자명해진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