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3일 목요일

2009년 8월 13일 목요일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서울노회 목사 임직 예배

1999년 5월 25일(화)오후2시 목사 임직 설교문

고린도전서 15:9~11

서울교회(www.seoulch.or.kr) 배성산 목사

목사임직자 : 이성원(공덕) 김광호(서문밖) 조성철(경서) 정경표(보광동)

오세봉(경복) 이정희(수도) 정미현(평광)

준목인허자 : 문은성(동원) 변영규(신흥)

목사후보생공인자 : 윤성진(향린) 최성실(서울제일) 예선영(공덕)

손은실(용산제일) 박현미(방주) 문지정(초원) 김현철(용산제일)

목사가 된다고 했을 때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소명감이다. 우리가 목사라는 성직을 하나의 직업으로 택하기 전에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어 이 일을 맡기셨다는 확실한 신념이 있어야 하는 일이다. 성직이란 우리의 선택에 의하여 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선택여부가 없기 때문이다. 조건이나 가능성이나 회피나 그런 것이 있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무상 명령적인 강요가 나를 결박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란 엄격히 따져 말하자면 목회자 자신의 일이 아니오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목사들은 자신을 "복음의 사신"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일꾼"이라 자처하여 충성과 복종만을 그 생명으로 삼았다. 이처럼 소명감을 안고 목회 전선에 나선 자는 언제나 두 개의 자의식(自意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는 책임감이요, 하나는 사명에서 오는 영광의식이다. 책임감은 그로 하여금 침착, 신중, 겸비, 조심, 근면, 경건, 순결, 청렴, 복종을 가지도록 할 것이오, 영광의식은 그로 하여금 대담, 고결, 염치, 용감, 고매하게 해 줄 것이다. 목사의 외침은 평범하거나 무기력하거나 흐릿할 수 없다. 그의 걸음은 주저나 방황이나 억지로 꾸미는 걸음일 수 없다. 숨쉴 때마다 사명감에 불탈 것이오, 잠을 깨면 소명의식에 옷깃을 바로잡게 되어야 한다. 목사의 삶은 끊임없는 하늘 영광의 연속이요, 피곤을 모르는 승리의 행진일 뿐이다.

신비하고 영광스러운 이 성직을 어떻게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복음의 사신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성직의 제1선에서 활약하였으나 언제나 자기 앞에 보이는 위험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주의와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고 반성과 자책을 깊이하며 겸손히 자기를 쳐 복종케 하기를 쉬지 않았다.

목사가 되고 목회를 해 가는 일에 몇 가지 주의해야 할 일이 있다.

목회자들의 경륜 어린 경험에서 얻는 교훈이 있다. 첫째는 목사는 너무 쉽게 교회생활에 젖는다. 너무 경솔히 하나님의 보좌 앞에까지 드나든다는 습성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자주 버릇없이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다룬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불손(不遜), 거룩함에 대한 불경(不敬), 장엄함에 대한 경솔(輕率)이 있다. 우리가 목회에 나서면 오래지 않아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거룩한 사실, 거룩한 곳에 대하여 분방하다는 핑계로 주님께 실망케 하는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적인 행사에 매우 바쁘면서도 우리 자신은 교회적이지 못할 경우가 너무 많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서서 옳은 길을 가리키는 사람일 뿐 그 옳은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을 가르치는 교사는 될지언정 진리를 찾는 순례자는 아닌 경우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서재는 하나님을 은밀히 찾는 다락방인 대신의 하나의 일터가 되고 만다. 우리는 너무 말을 많이 하다보니 말씀을 받아먹는 일을 곧잘 잊어버리고 만다. 감격과 경외의 심정 없이는 생각할 수 없고 거룩한 사실 위대한 진리를 이제는 아무 감각 없이 다루고 지껄이는 것이다. 신앙이 형식화되고 교회가 이론화되고 있는 현상이다. 거기에는 해골만 남아 있고 생명의 숨결이 없다. 불타고 남은 재만 있고 뜨거운 불은 꺼진 상태이다. 이러한 목사는 설교할 능력을 잃고 만다. 그러니까 자연히 딴 놀음이라도 해야 한다. 영적 경험이 고갈하였으니 저절로 무슨 꿍꿍이를 꾸며야 하게 된다. 이는 무서운 타락이요, 경보주의이다. 이것은 신학적이고 이론적인 논쟁에는 큰 관심과 흥미를 가지나 경건한 삶의 능은 잃은 것이다. 세력을 얻고 기반을 튼튼히 하려는 정치적 분란이나 그룹운동에는 앞장설 것이지만 자신이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경우에는 꽁무니를 빼고 만다. 그는 소명의식에서 성직생활을 시작하였다 하더라도 얼마 되지 않아서 모르는 사이에 쉽고 값싼, 성공했다는 목사 흉내만을 내는 것이다. 이는 정말로 주의해야 할 일임을 명심해야 한다.

둘째로 주의하여야 할 일은 일상적인 평범한 일 작은 일에 소홀하다. 성직자의 사명이란 영원과 시간, 하늘과 땅, 진리와 실생활, 복음과 행위, 하나님과 인간, 이 양자의 중간에 서서 이 둘을 화해시키는 역할이고 지상의 것을 하늘로 끌어 올려야 하며 복음의 진리를 실제 생활로 끌어내려 거기에 적응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그러치 않고 이 둘에 막힌 담의 벽이 생길 때 둘 다 무의미하게 되고 만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과 사람을 만나게 하는 역할을 하는 자라는 표현이 매우 타당하다. 성직은 삶을 하나님의 무릎 앞으로 안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의 현실 속에 소개하는 일이다. 목사가 거룩함을 잃고 평범을 모르거나 영원을 이해하되 시간을 무시하거나 하나님을 알되 사람을 등한히 한다면 그것은 어느 한쪽도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성직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목사의 입에서는 흔히 큰 술어들이 튀어나온다 더구나 젊은 목회자들의 입에서는 매우 굵고 큰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용어들이 마구 쏟아진다. 그러나 그런 말들이 다만 우리의 사소하고 평범한 생활 경험 속에까지 스며들게 될 때라야 의미가 있고 효과가 있다. 목사는 끊임없이 신도들의 일상생활을 살필 수 있어야 한다. 복음진리의 물줄기가 저들의 사소한 일상생활에까지 젖어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저들의 현실적인 삶의 고민과 문제와 요구를 찾아봄이 없이 큰소리만 친다면 이는 상아탑 속의 신앙은 될 수 있지만 사람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문제의 고민을 해결해 주는 복음일 수는 없다.

세 번째로 주의해야 할 사항은 성직자가 자신의 감정과 의지 곧 인격을 조화 있고 품위 있게 조율하는 일이다. 성직자들은 어느 정도 날카로운 정서의 비정상적인 감정상태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신령한 목사님이 되기 위하여 이상스런 모양을 하고 일종의 병적이고 신경 쇠약한 자 같은 풍모를 가지고 그 감정이 정상적이 아닌 방향으로 움직이는 이들을 본다. 교인의 감정을 쉽게 잡아 흔드는 설교는 마치 바다의 광풍과 같아서 신경에 카다란 강요작용을 일으키며 때로는 크게 격양시키기도 한다. 그것을 성령의 역사인 것으로 밀어붙이지만 실은 성령의 작용이기보다는 스스로 자기 도취에 빠져 자칫하면 마음의 문 밖에 쭈그리고 않아 때를 기다리던 악마가 틈을 보아 유혹하기 쉬운 기회로 제공되기도 한다. 유행처럼 번지는 불건전한 흥분 집회가 가끔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본다. 결코 부흥회의 효과를 무시하거나 배격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남의 흉내로 어리석은 추종을 일삼다가 유사목사 또는 모방목사(흉내목사)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주의해야 할 것은 세속적인 허영에 빠져들기 쉽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목회 생활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인기, 영광, 지위, 교권 등에 강한 열망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직자를 유혹하는 함정은 세상에 어디든지 있다. 이런 세속적인 경향가운데 가장 심각한 한 가지는 타협주의라고 생각한다. 일명 편법주의, 회색주의 혹은 기회주의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때로는 권모와 술수도 사양하지 않으며 기회를 따라 형편을 따라 농간을 부리는 타협주의 말이다. 아첨을 겸손으로 가장하고 계략을 능력이라 하며, 권모술수를 슬기로 가장하고 비굴을 양보라 하는 사고방식이다. 그러므로 타협주의는 결국 그 자신의 도덕적 이상을 저급한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일이요, 자기의 고상한 신념을 닫고 불의에 영합시키는 놀음에 놀아난다. 타협주의는 흑과 백의 중간노선을 걷기 좋아하기 때문에 흑도 아니오 백도 아닌 회색주의에 빠진다. 밤중도 아니고 대낮도 아닌 어스름한 인생이요 새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박쥐의 놀음일 뿐이다. 이런 사람들이 마침내 예배자의 처소를 강도의 굴혈로 만든다. 하늘의 복과 인간의 박수를 한꺼번에 얻으려 하고 회장이나 거리어구에 주민 기도처를 만들어 내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는 나팔을 불고 제 보따리 펼치는 위선자가 생겨난다. 그러나 그들의 소행은 마치 모래 위를 흐르는 시냇물 같아서 얼마 안 가서 다 지하로 스며들고 마는 생명 없는 모래밭 성직일 뿐이다.

세속주의와의 경합 속에서 또 하나 문제를 든다면 성공을 조급하게 서두르는 초조한 인위적 노력을 삼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서 빨리 일류 목사가 되고 싶고 유명해 지고 싶어 조급해 하는 마음, 인기 끄는 목회, 이것은 목사 앞에 놓인 함정이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 주님이 광야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당하신 유혹은 자기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끈질기게 주님을 괴롭혔다. "네가 내게 꿇어 절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영광을 네게 주리라" 그것은 역시 우리에게로 오는 유혹이기도 하다. 우리가 목사가 되는 첫날부터 이 마귀의 꼬임은 평생을 따를 것이다. 이상의 종합적인 경륜의 경험에서 얻은 지적 몇 가지를 소개하면서 성직인 목사직은 어렵다. 다른 직업은 어떤 기술을 습득하면 되겠지만 성직은 반드시 소명감에서 출발해야하고 그러면서도 길옆으로 조금만 한눈을 팔면 바로 굴러 떨어지고 마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항상 기도해야 한다. 오직 십자가의 주님만을 위해 충성된 종으로 겸손히 빛도 이름도 없이 섬기는 하나님의 종임을 자각해야 한다.

목사 안수를 받는 여러분은 이제 목사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름 부은 종이 됩니다. 하나님의 종은 어떤 사람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종은 자기 선전을 하지 않는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일도 없고 대우가 나쁘다고 투덜대는 일도 모른다. 그는 과연 털 깎는 자 앞에 끌려가는 양의 모습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온순한 인격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설치고 싸우고 자랑한다.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서 이익, 출세, 영광만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 주의 종,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일꾼은 조용하다. 입을 다물고 묵묵하다. 사랑과 충성과 봉사만이 있을 뿐이다. 또한 하나님의 종은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고 인격의 가치를 소중히 여김으로 인간을 사랑한다. 겉모양으로 판단한다함은 그 사람이 가진 돈이나 지식이나 세상 권력 따위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을 상품화한다. 거래의 수단으로 삼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모든 인간의 영혼을 사랑할 따름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종은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이다. 왠지 모르지만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이들은 흔히 가난과 고독과 고난을 맛본다. 그것이 이른바 십자가의 길이다. 그러나 그 길만이 참된 인생의 승리의 길이요 인류의 희망이 된다. 부름 받아 나선 이는 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사람이 사람다움으로 제 모습 찾기에 노력해야 한다. 제자리, 제 모습을 잃고 설쳐대며 자꾸만 경박해 간다. 전문적 지식, 자격취득, 배금주의 등등의 자격을 갖춘다면 "무엇이 되기"는 쉽다. 그러나 그 목적을 이루어 '답다'라는 인정을 받는 과정은 그 사람 참 모습에(인품) 관한 문제이다. 회장이 되고 총회장이 되고 총장이 되고, 정치가, 교육자, 변호사, 의사, 장관, 대통령이 되기는 쉽지만 정말 "답다"라는 평을 받는 것을 무엇일까? "답게" 사는 삶의 자세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목사답게 살자!

21세기를 여는 대망의 미래 기약에 하나님의 종으로 탄생한 것을 축복하면서 이 분들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의 참신한 '부름 받아 나선 이'가 되기를 전망한다.

2009년 8월 12일 수요일

먼저 구하는 것

먼저 구하는 것

이사야 40:1~5

마태복음 6:19~34

배성산 목사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난의 근원을 찾아가 보면 그 밑바탕에는 국민들의 생활이 개선되어야 함을 볼 수 있다. 경제는 성장하는데 국민 생활은 개선되지 않고 오히려 삶의 질이 뒷걸음질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나와 사회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시야에서 볼 때 한국인의 가치관은 아직도 서구인들의 보편적 개인주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폐쇄적 집단이기주의에 지배 되고 있다. 보편적 개인주의는 전체사회의 이익과 자기 개인의 이익을 직결시켜 이를 동시에 추구 해야 하는 가치관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폐쇄적 집단이기주의는 전체 사회속에 존재하는 내 가족, 대학 동문, 같은 고향, 같은 성씨와 같은 소집단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것으로서 이들 소집단에 소속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불가피하게 배타성을 지니게 된다. 서구의 보편적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적인 부정이나 불의를 용납하지 않고 고발하는 정신이 강하다. 사회 질서를 지키고 사회 시설을 아끼는 마음은 사회전체 이익의 틀 안에서만 개개인의 이익이 극대화 될 수 있고 개개인의 이익을 존중하는 틀 안에서만 사회 전체의 이익이 극대화 될 수 있다는 이른바 보편적 개인주의를 생각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오늘과 같은 우리 사회에 자리잡고 있는 가치관에서는 합리주의와 효율이 생성될 수 없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6장을 통하여 예수의 3가지 소유에 대한 원리를 배워야 한다. 첫째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물질을 다루기도 하려니와 만들지는 못한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사람이 '내 것이다'할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탁하신 것이다. 둘째는 사람은 물건보다 중하다. 사람을 물건으로 다루며 재물을 모으면 그것도 불의한 재물이 된다. 셋째로 재물은 종속적 선이요 최상의 선이 될 수 없다. 돈은 자기의 사욕을 위해 쓸 때 나쁜 것이요 남을 위해 쓰면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재물을 가진 자는 책임이 크다. 자기 뜻 때로 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쓸 것이다. 사람이 먼저 소유하고자 하는 것은 생활 속에서 피부로 느껴지는 것, 즉 의식주의 해결을 생각하지만 자칫 물질지상주의로 빠지게 된다. 그러나 성서는 '먼저'라는 순차적인 언어를 써서 선후로 나누어 말씀하신다. 먼저는 '그의 나라와 의'를 우선으로 강조한 것이다.

한해를 보내고 한 해를 맞으며 송구영신의 인사를 나눌 때 사람들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인사한다. 흔히 '복'이라고 전제된 인사말 속에는 물질의 풍요를 담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의사에게 새해 인사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했을 때 실제로 그 의사에게 비는 물질의 복이라는 의미는 금년에 치유 될 수 없는 병이 만연하여 병원이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리라는 소망을 담게 된다. 또한 우리가 변호사에게 새해 인사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하고 인사했을 때, 우리는 금년에 무질서와 폭력이 만연하여 변호사가 할 일이 많게 해달라는 소망이 돼버리고 만다. 더구나 장의사에게 비는 복은 금년에 사망하는 사람이 많아서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는 소망인데, 만약 우리 사회가 전쟁이나 전염병의 유행, 삼풍백화점과 같은 붕괴사고로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상황이 생긴다면 우리는 장의사에게 내리는 축복으로 봐야 할까?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두 '먼저' 자기 앞의 이익만을 놓고 복을 빈다면 이것이야말로 폐쇄적 집단 이기주의의 현실이라 말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이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은 당연하다. 그런 삶에의 의지와 정열은 인간 역사와 문명을 가능케 하는 파토스로 작용한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 행복한가 무엇이 생명에의 참여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그런 조건들만을 소유하려든다는데에 있다. 특히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양식은 바벨탑을 쌓아가던 창세기의 고대인들처럼 경쟁적으로 자신의 소유물을 쌓아가는 것으로 삶을 확인하려고 한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무엇인가를 소유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최대의 목적으로 할 때 인생살이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함께 풍성하게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을 오리겐(Origen)에 의하면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되 더 큰 것을 구하라 그리하면 작은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늘의 것을 구하라 그리하면 땅의 것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응용풀이 하였다.

정권교체가 이루어져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제2건국의 틀'을 짜자고 소리를 높이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의 구조 변화와 개혁을 부르짖고 있는 이 때에 우리의 삶 속에 생활의 의식 구조를 다시한번 점검하지 않을 수 없다. 해외여행을 해 보면 좋은 환경과 자연 경관이 보전되고 시냇물, 강, 바다 속에 노니는 고기들, 맑은 공기, 주차질서, 교통질서 등 질서 정연한 모습과 마을마다 도서관이나 양로시설, 정년퇴임자를 위한 시설, 의료보험 서비스 등 질서가 있고 걱정이 없을 것 같은 복지사회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선진국 보다 더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 선진국의 서민들이 거의 월세로 사는데 비해 우리는 전세나 자기집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미국이나 독일에서 5억 이상의 재산을 소유한 사람은 흔치 않다. 이들이 소득이나 월급이 적어서가 아니다. 국민이 내는 세금의 차이가 크게 다르다. 이들은 개개인은 가난하지만 사회는 부유하다. 반면 우리나라는 개개인은 부자이지만 사회는 가난하다. 우리는 먼저 사회재산이라 할 수 있는 공기, 물, 도로, 학교, 철도, 산, 나무 등 사회 공공재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회저축에는 4가지 가 있다. 첫째는 세금이다. 둘째는 연금, 의료보험, 생명보험, 출연금 등이다. 셋째는 유산의 사회 환원(상속관념의 극복)이다. 넷째는 자원봉사이다. 부유한 나라 선진국은 자기 재산보다 사회재산에 관심을 갖고 공동체의 삶을 지향하며 순응하려 한다. 폐쇄적 집단이기 속에 갇혀 있는 우리를 일깨우는 일면이라 할 수 있다.

거품을 빼는 오늘의 현실 하에 개혁해야 할 문화적 한 실례를 들면, 혼례문화를 들 수 있다. 서구에서는 양가 가족과 주례와 함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저녁에는 양가 친척을 초대 하여 저녁식사를 함께 나눈다. 신랑신부는 집마련도 필요없고 생활에 직접 필요한 것만 간단히 장만한다. 우리나라는 청첩장, 방명록, 약혼식, 예단, 함, 폐백, 결혼식장마련, 식사대금 등이 소요된다. 1년에 40만쌍이 결혼한다는데(80만명이 결혼하는 셈) 그 결혼 비용은 평균 3,500만원이라 한다. 이것을 종합하면 1년에 우리나라에서 30조억원이 낭비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 30조억은 현재 실업자 200만명에게 매달 150만원씩 1년동안 지급할 수 있는 돈이다. 이렇게 되면 혼례문화 간소화를 위해 개혁해야 할 당위에 놓이게 된다. 귀금속 수입 순위를 보면, 미국, 일본 다음 세 번째가 한국인데 귀금속 수입비용이 10조억원이나 든다고 한다. 이것만 가지고도 실업자 200만명에게 매달 50만원씩 1년간 지급할 수 있는 돈이다.

기독교는 물질을 부정하다거나 경시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과 물질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세우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 물질을 올바르게 다룰 수 있는 근본적인 태도를 기독교는 가르쳐 줄려고 한다. 신약에서 물질의 소유와 사용 그리고 그 분배를 '청지기의 직분'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지적할 수 있는 두 가지 기독교 경제윤리는 첫째 청지기 의식이요 둘째는 소명의식이다. 인간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청지기 의식은 오늘 우리 상황에서 절실히 요청된다. 청지기는 주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기심을 극복해야 한다. 생명과 재산의 궁극적 주인은 하나님이요 청지기는 관리자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충성과 헌신이 요청된다. 한편 소명의식은 우리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직업의식이다. 한 사회의 안전도는 그 사회내의 직업 만족도와 정비례한다. 그렇다면 직업 만족의 근원은 무엇일까? 임금이라 할 수 있겠으나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직업을 가치와 보람의 원천으로 믿는 마음의 자세이다. 이러한 마음의 자세는 직업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여길 때 가능하다. 고도의 물질문명이 가져다주는 폐쇄적 이기주의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심각한 괴리와 소외현상 등은 엄청난 가치혼돈을 몰고 왔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최우선적 추구대상으로 삼을 때에만 모든 염려에서 놓여나 항상 자족할 수 있으리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국 경제를 개혁하고 틀을 짜기 위해서, 경제활력을 회복하기 위해 생산비는 낮고 생산성은 높게 해야하고 경제 정의와 도덕성을 확고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먼저 구하는 것'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우리 삶의 현실로 자명해진다.

2009년 8월 10일 월요일

자본주의 정신을 알게 한 막스 베버 1

(Max Weber 1864-1920)
2009년 8월 9일
배성산 목사(서울교회 명예목사)
독일 에어푸르트에서 1864년에 태어난 막스 베버(Max Weber)는 아버지 막스 베버의 이름을 따라 그냥 막스 베버라 칭하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막스 베버 1세와 어머니 헬레네 베버(Helene Weber)와의 사이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유복한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났다.
법률가인 아버지 베버 1세는 베를린 시의 행정가로 일하다가 베버가 태어날 당시 에르푸르트의 시의회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고 쾌락을 즐기는 세속적인 사람이었다. 집에서는 권위주의적인 가부장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베버의 인간적인 면모나 지적 세계의 형성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고 반면에 어머니 헬레네에게서 물려받은 칼빈주의 신앙을 이어 받아 덕목이 몸에 밴 신앙인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에게는 엄격하면서도 약자에 대한 사랑으로 다양한 사회봉사에 헌신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인문주의의 역사와 고대문학에 대한 교육도 받았다. 그리고 외가의 분위기의 영향은 막스 베버의 삶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다.
막스 베버의 어머니에게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고 사회학적인 면면에서도 드러난다. 막스 베버는 1893년 베를린 대학에서 부교수로 로마법, 독일법 및 상법을 가르치면서 그해 초가을 베버는 5촌인 마리안네 슈니트거(Marianne Schnitger,1870-1954)와 결혼한다. 그녀는 막스 베버가 학문적 업적을 쌓는데 없어서는 안 될 반려자가 된다. 그녀는 윤리적 목표가 고상하고 의지가 강한 점에서 베버의 어머니와 비슷하였다.
또한 막스 베버와 마리안네는 서로가 부부이면서도 동반자로서의 삶을 보여 주었다. 남편을 훌륭하게 내조하여 학문의 지적 동반자로 흠이 없었다. 막스 베버는 30세가 되던 해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경제학, 재정학 정교수로 초빙 되었을 때 독일 학계를 놀라게 하였고 1897년에는 하이델베르크대학의 경제학 및 재정학 정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리고 1919년 뮌헨대학의 사회과학, 경제사 및 경제학 정교수로 초빙되기도 하였다. 그는 1920년 6월 막스 베버는 뜻하지 않게 감기로 인해 폐렴이 악화되어 1920년 6월 14일 56세로 삶을 마감한다. 막스 베버가 생존하던 시대의 여건은 독일이 뒤 늦게 통일을 이룩하고 산업혁명을 완수한 뒤 제국주의 쟁탈전에 뛰어든 시기였다. 철혈 재상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로 대표되는 제2 제국(1871-1918)주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 독일은 군주주의, 권위주의, 국가주의, 관료주의가 팽배 하였던 시기였다. 여기에 당시 시민사회는 미성숙한 독일 시민이었고 부르주아 계층은 귀족계급의 지배 아래 몸을 수그리고 대학인도 지식인도 독일 제국의 지배체제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살았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민의 의식을 보고 막스 베버는 정치적으로 미숙한 취약점을 알아 이에 독일 역사의 종말을 고할지도 모른다고 위기의식을 고취시키고 있었다.
1918년 그가 쓴 성명인 '새로운 질서의 독일에서의 의회와 정부'라는 글에서 비스마르크의 유산을 통렬하게 꼬집었다. 그는 군주주의적 정부라는 미명 하에 숙명적으로 지배를 받도록 길들여진 국민을 담보로 유산을 남겼다고 말한다. 이 유산이 지배하던 세상에서 베버가 저항의 무기로 선택한 것은 학문을 통한 비판이었다. 그 때 막스 베버가 비판의 거점으로 삼는 것은 '방법론적 개인주의'였다.
그는 이 비판과 혁명을 통해 대학을 '정신의 공화국'으로 만들려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학은 정신적 자유의 마당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사상가들은 그를 칼 마르크스, 에밀 뒤르켐 등과 함께 현대 사회학을 창시한 사상가 중 하나로 보는 것이다. 그가 원래는 법학도였으나 경제학으로 전공을 바꾼 것은 형식적 도그마를 버리고 다양한 정신과학과 사회과학이 교차되는 경험적 종합과학을 선택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역사, 경제, 정치, 법제도, 종교, 철학, 예술 등 거의 모든 인문 사회과학적 현상들을 자신의 인식지평 안으로 끌어드리면서 사회학적 분석에 필요한 개념장치를 구축해내어 현대 사회학의 기본을 마련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또한 그는 종교사회학과 정치체제의 합리화도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이런 것은 그가 형식적 도그마에서 경험적 사회과학으로 새로운 정신세계를 찾아 총체적으로 학문적 어우름을 알게 한다. 그 중에서도 경제 분야에 관심을 갖고 그의 유명한 저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종교사회학적 차원에서 큰 의미를 부여했다. 막스 베버가 관심 있게 다룬 것은 칼빈주의이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자본가, 기업가, 숙련된 상급노동자들 대부분이 프로테스탄트라는 점이었다. 여기에서 이 자본주의의 윤리가 초기 경제적 변동으로 그 정신에 반영되었는데 칼빈의 소명의식과 금욕주의가 자본주의의 경제적 합리화를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
20세기가 출범하면서 그가 세계종교를 연구 하면서 관심을 가진 것은 세 가지 관점에 대한 의문에 그의 대답이 있다. 첫째 16-17세기에 근대 자본주의가 왜 중국, 중동 등 당시의 고도 문명권에 비해 후진성을 면치 못했던 서유럽에서 발생하였는가? 하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즉 개신교의 금욕주의 윤리가 자본주의 특유의 노동윤리, 기업가 윤리, 생활태도 등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막스 베버의 그 유명한 대답이다.
둘째는 그는 종교의 분석대상을 개신교뿐만 아니라 유교, 도교, 불교, 힌두교, 유대교 등으로 확장했고 분석 내용도 단순히 종교론이 아니라 비교종교의 문명론이라 할 만큼 펼쳐 나갔다. 베버는 여기에서 세계종교들의 세계관 구조를 합리주의라는 기준에 의거하여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모든 종교에 대하여 나름의 합리성을 보여주며 해당 종교와 해당 사회에 어떤 영역이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합리화되었는가 하는 것은 그 종교의 발생과 발전을 주도하는 사회 계층의 관념적 이해관계와 현실적 이해관계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다고 주장하는 것 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세계화 시대에 문명 간 대립과 갈등의 원인을 알게 하는 것이고 화해의 가능성을 모색하는데도 결정적으로 중요성을 갖는 분석적인 출발점이 되게 하는 것이다. 셋째는 과학과 세속화의 시대가 오히려 종교의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종교적 신앙의 동기와 배경이 무엇이든 간에 종교는 현존하는 인류의 절대 다수에게 여전히 호소력을 발휘하는 정신적 힘이라는데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막스 베버는 인간은 물질적 생존의 욕구만 갖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존재로서의 삶의 궁극적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는 실존적 욕구도 함께 갖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이것은 인간이 경제적 잉여가치만이 아니라 문화적 잉여가치에 대한 욕망도 있다는 점을 알게 한다. 근대의 과학적 합리주의는 이런 욕구를 충족시켰던 기존의 종교적, 윤리적 가치체계가 무능하다고 하고 여기에 첨단과학에 21세기의 종교가 부활해야 하는 근본 이유를 알았다.
베버 사상의 중요한 핵심은 사회과학이 가치판단을 하기 전에 사실로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고 몰가치성과 가치중립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막스 베버가 제기한 문제들은 1세기가 지난 현대에 다소 변형된 형태로 다시 제기 되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자본주의 형태 중 근대적 자본주의는 이전의 전통적 자본주의와는 달리 부의 획득을 개인의 향락에 사용하는 것이 되었기에 합리적인 태도에 주목하며 이러한 사고에 대해 그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윤리와 결부하여 연구하고 소명(召命)이라는 개념을 찾아 자본주의의 정신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 소명은 현실 생활에서 직업에서의 성실함과 금욕주의적 생활태도를 낳게 한다. 그리고 이 프로테스탄트의 생활방식은 세상의 질서 속에서 살아가면서 빛을 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들은 자연스럽게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하게 되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윤추구를 통한 소비적 향락에 철저하게 반대하는 것이며 부의 축적이 목적이 되는 것도 반대하는 것이다. 막스 베버가 직업 노동의 정당한 열매로서의 부의 획득은 신의 축복이라 하며 여기에 신이 원하는 대로 개인과 전체가 삶의 목적에 부합하게 재산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