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10일 월요일

자본주의 정신을 알게 한 막스 베버 1

(Max Weber 1864-1920)
2009년 8월 9일
배성산 목사(서울교회 명예목사)
독일 에어푸르트에서 1864년에 태어난 막스 베버(Max Weber)는 아버지 막스 베버의 이름을 따라 그냥 막스 베버라 칭하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막스 베버 1세와 어머니 헬레네 베버(Helene Weber)와의 사이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유복한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났다.
법률가인 아버지 베버 1세는 베를린 시의 행정가로 일하다가 베버가 태어날 당시 에르푸르트의 시의회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고 쾌락을 즐기는 세속적인 사람이었다. 집에서는 권위주의적인 가부장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베버의 인간적인 면모나 지적 세계의 형성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고 반면에 어머니 헬레네에게서 물려받은 칼빈주의 신앙을 이어 받아 덕목이 몸에 밴 신앙인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에게는 엄격하면서도 약자에 대한 사랑으로 다양한 사회봉사에 헌신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인문주의의 역사와 고대문학에 대한 교육도 받았다. 그리고 외가의 분위기의 영향은 막스 베버의 삶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다.
막스 베버의 어머니에게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고 사회학적인 면면에서도 드러난다. 막스 베버는 1893년 베를린 대학에서 부교수로 로마법, 독일법 및 상법을 가르치면서 그해 초가을 베버는 5촌인 마리안네 슈니트거(Marianne Schnitger,1870-1954)와 결혼한다. 그녀는 막스 베버가 학문적 업적을 쌓는데 없어서는 안 될 반려자가 된다. 그녀는 윤리적 목표가 고상하고 의지가 강한 점에서 베버의 어머니와 비슷하였다.
또한 막스 베버와 마리안네는 서로가 부부이면서도 동반자로서의 삶을 보여 주었다. 남편을 훌륭하게 내조하여 학문의 지적 동반자로 흠이 없었다. 막스 베버는 30세가 되던 해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경제학, 재정학 정교수로 초빙 되었을 때 독일 학계를 놀라게 하였고 1897년에는 하이델베르크대학의 경제학 및 재정학 정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리고 1919년 뮌헨대학의 사회과학, 경제사 및 경제학 정교수로 초빙되기도 하였다. 그는 1920년 6월 막스 베버는 뜻하지 않게 감기로 인해 폐렴이 악화되어 1920년 6월 14일 56세로 삶을 마감한다. 막스 베버가 생존하던 시대의 여건은 독일이 뒤 늦게 통일을 이룩하고 산업혁명을 완수한 뒤 제국주의 쟁탈전에 뛰어든 시기였다. 철혈 재상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로 대표되는 제2 제국(1871-1918)주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 독일은 군주주의, 권위주의, 국가주의, 관료주의가 팽배 하였던 시기였다. 여기에 당시 시민사회는 미성숙한 독일 시민이었고 부르주아 계층은 귀족계급의 지배 아래 몸을 수그리고 대학인도 지식인도 독일 제국의 지배체제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살았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민의 의식을 보고 막스 베버는 정치적으로 미숙한 취약점을 알아 이에 독일 역사의 종말을 고할지도 모른다고 위기의식을 고취시키고 있었다.
1918년 그가 쓴 성명인 '새로운 질서의 독일에서의 의회와 정부'라는 글에서 비스마르크의 유산을 통렬하게 꼬집었다. 그는 군주주의적 정부라는 미명 하에 숙명적으로 지배를 받도록 길들여진 국민을 담보로 유산을 남겼다고 말한다. 이 유산이 지배하던 세상에서 베버가 저항의 무기로 선택한 것은 학문을 통한 비판이었다. 그 때 막스 베버가 비판의 거점으로 삼는 것은 '방법론적 개인주의'였다.
그는 이 비판과 혁명을 통해 대학을 '정신의 공화국'으로 만들려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학은 정신적 자유의 마당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사상가들은 그를 칼 마르크스, 에밀 뒤르켐 등과 함께 현대 사회학을 창시한 사상가 중 하나로 보는 것이다. 그가 원래는 법학도였으나 경제학으로 전공을 바꾼 것은 형식적 도그마를 버리고 다양한 정신과학과 사회과학이 교차되는 경험적 종합과학을 선택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역사, 경제, 정치, 법제도, 종교, 철학, 예술 등 거의 모든 인문 사회과학적 현상들을 자신의 인식지평 안으로 끌어드리면서 사회학적 분석에 필요한 개념장치를 구축해내어 현대 사회학의 기본을 마련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또한 그는 종교사회학과 정치체제의 합리화도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이런 것은 그가 형식적 도그마에서 경험적 사회과학으로 새로운 정신세계를 찾아 총체적으로 학문적 어우름을 알게 한다. 그 중에서도 경제 분야에 관심을 갖고 그의 유명한 저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종교사회학적 차원에서 큰 의미를 부여했다. 막스 베버가 관심 있게 다룬 것은 칼빈주의이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자본가, 기업가, 숙련된 상급노동자들 대부분이 프로테스탄트라는 점이었다. 여기에서 이 자본주의의 윤리가 초기 경제적 변동으로 그 정신에 반영되었는데 칼빈의 소명의식과 금욕주의가 자본주의의 경제적 합리화를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
20세기가 출범하면서 그가 세계종교를 연구 하면서 관심을 가진 것은 세 가지 관점에 대한 의문에 그의 대답이 있다. 첫째 16-17세기에 근대 자본주의가 왜 중국, 중동 등 당시의 고도 문명권에 비해 후진성을 면치 못했던 서유럽에서 발생하였는가? 하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즉 개신교의 금욕주의 윤리가 자본주의 특유의 노동윤리, 기업가 윤리, 생활태도 등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막스 베버의 그 유명한 대답이다.
둘째는 그는 종교의 분석대상을 개신교뿐만 아니라 유교, 도교, 불교, 힌두교, 유대교 등으로 확장했고 분석 내용도 단순히 종교론이 아니라 비교종교의 문명론이라 할 만큼 펼쳐 나갔다. 베버는 여기에서 세계종교들의 세계관 구조를 합리주의라는 기준에 의거하여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모든 종교에 대하여 나름의 합리성을 보여주며 해당 종교와 해당 사회에 어떤 영역이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합리화되었는가 하는 것은 그 종교의 발생과 발전을 주도하는 사회 계층의 관념적 이해관계와 현실적 이해관계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다고 주장하는 것 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세계화 시대에 문명 간 대립과 갈등의 원인을 알게 하는 것이고 화해의 가능성을 모색하는데도 결정적으로 중요성을 갖는 분석적인 출발점이 되게 하는 것이다. 셋째는 과학과 세속화의 시대가 오히려 종교의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종교적 신앙의 동기와 배경이 무엇이든 간에 종교는 현존하는 인류의 절대 다수에게 여전히 호소력을 발휘하는 정신적 힘이라는데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막스 베버는 인간은 물질적 생존의 욕구만 갖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존재로서의 삶의 궁극적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는 실존적 욕구도 함께 갖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이것은 인간이 경제적 잉여가치만이 아니라 문화적 잉여가치에 대한 욕망도 있다는 점을 알게 한다. 근대의 과학적 합리주의는 이런 욕구를 충족시켰던 기존의 종교적, 윤리적 가치체계가 무능하다고 하고 여기에 첨단과학에 21세기의 종교가 부활해야 하는 근본 이유를 알았다.
베버 사상의 중요한 핵심은 사회과학이 가치판단을 하기 전에 사실로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고 몰가치성과 가치중립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막스 베버가 제기한 문제들은 1세기가 지난 현대에 다소 변형된 형태로 다시 제기 되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자본주의 형태 중 근대적 자본주의는 이전의 전통적 자본주의와는 달리 부의 획득을 개인의 향락에 사용하는 것이 되었기에 합리적인 태도에 주목하며 이러한 사고에 대해 그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윤리와 결부하여 연구하고 소명(召命)이라는 개념을 찾아 자본주의의 정신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 소명은 현실 생활에서 직업에서의 성실함과 금욕주의적 생활태도를 낳게 한다. 그리고 이 프로테스탄트의 생활방식은 세상의 질서 속에서 살아가면서 빛을 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들은 자연스럽게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하게 되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윤추구를 통한 소비적 향락에 철저하게 반대하는 것이며 부의 축적이 목적이 되는 것도 반대하는 것이다. 막스 베버가 직업 노동의 정당한 열매로서의 부의 획득은 신의 축복이라 하며 여기에 신이 원하는 대로 개인과 전체가 삶의 목적에 부합하게 재산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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